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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서

조회 수 1448 추천 수 0 2015.12.30 20: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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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고무신을 신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물기가 남은 손을 털어내며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주인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는 가게 안의 모든 정리를 끝내놓고서 당장이라도 문을 닫을 수 있다는 태세를 취하고 계셨다. 취중에도 스산한 무언의 기운을 재빨리 알아채고 자리에 돌아와 앉아 시간을 확인하니 곧 11시. 주위는 고요했고 우리 테이블만 남아있었다. 생각해보니 아까부터 주인아저씨가 가게를 정리하며 영업종료의 분위기를 넌지시 흘려온터라 내가 먼저 일행들에게 마감을 알렸다. '종료하시죠'.


요즘 자주 드나드는 집이라며 강피디에게 이끌려 가게된 그 곳은 벽면엔 소리꾼 장사익 아저씨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가 걸려 있었고, 또 다른 벽 한켠엔 가야금도 걸려있는 것이 인사동에 딱 어울리는 한옥을 개조한 집이었다. 대화의 틈에서도 계속 이 집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며 좋다를 남발하며 발견한 것들이 많은데 이제와 떠올려보니 잘 기억이 나질 않네. 주의력이 산만한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고. 그래도 기억력은 좋았는데 요즘 점점 모든게 희미해지는 느낌은 왜일까. 여튼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가게 문을 나섰다. 


가게 이름도 마음에 든다. '싸립문을 밀고 들어서서'. 간판을 올려다보며 입김을 불면서 강피디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고보니 일대의 분위기가 정말 조용하고 어두웠다. 우리 동네만 하더라도 새벽까지 문을 닫지 않는 집이 많은데 고작 밤 11시에 모든게 정리되는 이 풍경은 실로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때 마침 강피디가 문을 밀고 나오며 거들었다. 인사동에서 술자리를 끝내고 나면 이 동네가 하루의 끝임을 알려주는 것 같아 좋다고.. 그러하다. 고된 일과를 보내고 좋은 사람들과 모여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수다로 마무리하고 나왔는데, 여전히 세상은 번쩍번쩍 살아있고 그런 것보다 조금 쓸쓸하진 몰라도 어둡고 조용한 지금이 좋다.




김감독님을 역까지 배웅해드리고 광화문쪽으로 걸어갔다. 안국동 사거리쯤을 지는데 강피디가 물었다. 여기 이 돌담길 참 예쁘지 않냐고. 스윽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옅은 빛의 가로등과 띄엄띄엄 가로수들, 몇 안되는 행인들 그리고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딱 이맘쯤이었는데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그 곳에. 내가 앞서 걷고 상대는 두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그러다 그녀가 내 팔을 잡아 세웠고 나는 그 돌담길 거리에 서서 그녀를 울렸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쯤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길에 서있는 애처로운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때 난 많이 지쳤었고 나 역시 많이 울었었다. 누구보다 외롭고 처량한 신세같아 스스로 긍민했을 정도니까. 그래도 달라진건 없다. 여전히 그 거리는 쓸쓸하고 외롭게 보일 뿐이다. 다만, 시간이 방향을 돌려 놓았다. 원망의 방향을 그녀에게서 나로.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텐데 너무 했나 싶은거지. 그래서 강피디에게 답했다. 아니, 난 여기 안좋은 기억이 있어서 별루야. 


그 잔해의 여운은 잠시 접어두고 계속 걷다보니 저 멀리 서촌이 보인다. 북악산도 크게 눈에 들어오고 이 근처를 경찰복을 입고 뛰어다니던 위태롭던 기억도, 그리고 얼마전 어느 낮에 을지면옥에서 낮술을 마시고 창경궁을 거닐던 그 때의 평화로움도 함께 보인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거리 곳곳에 예전 기억들이 빼곡히 심어져 있는걸 보니 종로에서 추억이 참 많구나 싶다. 이내 마음이 시려온다. 요즘은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 좀 빡세게 나타난다. 왜지. 왜 지나간 것들이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아프지.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동네 주위에서의 추억이라고 할 것이 몇 없어 '그리움'에 대한 내성이 사라져 그런 걸까. 나이가 드는걸까. 그런 이유로 종로를 갈 땐 기꺼이 가는 듯하다. 동네 밖을 잘 벗어나지 않는 은둔형인 내가 그 곳으로 간다. 시려도 기꺼이 즐겁게.




오늘도 종로 어딘가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했었는데, 김감독님의 일신상의 이유로 모임이 연기가 되어 시간이 남아 낮에 배송 온 책들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무런 기대없이 아니, 어쩌면 약간의 반감(?)으로 주문해본 책이었는데 차 두잔과 틀어놓은 두 앨범의 플레이리스트가 끝이 날 무렵 기분좋게 따뜻하게 책도 끝이 났다. 그런데 우연일까. 책에 광화문이란 장소가 여러번 나와서 문득 종로에서의 지난 일이 떠올라 상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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