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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터

조회 수 1351 추천 수 0 2016.04.07 0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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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터


분명 난 가만히 있었다. 아무 것도 안했는데 세번 째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났다. 손만 보면 파이터. 유독 오른손에만 상처가 많다. 왼손은 늘 모른척한다. 겸손한 녀석. 겸손한 아픔을 뒤로하고 산책이나 가려고 주섬주섬 옷을 챙기는데 트드드드. 이거 무슨 소리니? 이거 혹시 빗소리니? 정말 어떨 땐 쉬운 일도 안되는 그런 날이 있는데 하필 저스트 오늘이네. 이 상처가 징조였네.


노트북만 챙겨서 집 근처 카페로 도망가기로 했다. 도저히 답답해서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까 도저히 답답함으로 꽉 찬 이 마음을 어찌할 방도가 없다. 우산을 써야하는 귀찮음을 무시하고 잘 도착했다. 카페 안을 빙 둘러보니 남아 있는 자리가 보자.. ㅈㄹ맞네. 완벽하시다 진짜. 


어쩌겠는가? 맞서 싸워야지. 왜 나만 방향이 다르지? 하는 일렬로 앉은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는 그런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자리를 잡았다. 딱 요즘 내 상황같네. 어쩌겠는가, 싸우자!


싸우기 전에 마실 것 부터. 분명히 걸어오면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생각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라니.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주둥이가 뇌를 지배하는 것 같다. 요즘 늘 아이스만 먹어서 입에 붙었네 붙었어. 그래서 말을 줄이고 한 두어번 꾹꾹 눌러서 얘기해야 하는데... 정말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데.. 망했네. 근데 글은? 글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쓰는게 더 위험한거 아닌가? 몰라. 싸우자. 일단 따뜻할 뻔했던 커피 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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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터의 발단 


사실 앨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 때까진 봄 꽃을 볼 때처럼 설레고 좋았다. 4월이 오기 전에 마무리하고 4월엔 여행 가야지! 하며 좋은 꿈을 꾸고 있었다. 허나 한창 믹스 작업중에 도저히 이건 안되겠다 싶은 한 곡이 꽃샘추위처럼 툭 튀어 나왔다. 


후.. 고민 끝에 악기부터 다시 녹음하기로. 근데 처음만 어렵지, 계속 마음 한켠에 찝찝하게 남아 있던 곡들이 스물스물 "저도 있어요 저도 좀 봐주세요."  후.. 그렇게 수정하기로 한 곡이 6곡 중 절반인 3곡. 음악을 듣기도 싫어졌다. ‘어쩔 수 없다’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던 그 기억이 떠오르면서 정말이지 8기통 터보엔진처럼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쩔 수 없다’ 라는 말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리고 싶다. 근데 또 그렇다고 어디다가 터트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다스려야 할 수 밖에. 시원한 아메리카노 쭉 들이키면서 말이다. 


신경을 많이 써서일까, 윗입술에 재밌게 생긴 아이가 생겼다. 아프진 않은데 좀 흉하다. 그래서 사진을 입술 위로 잘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뾰루퉁한 지금의 맘이 잘 담겨있는 사진 같아 골라봤다. 아무 생각없이 찍었었는데 지금보니 마치 음악에 삐져있는 뮤지션 같은 느낌도 들고. 자갈치 과자처럼 나온 단정한 헤어스타일은 덤.


아무튼, 쉽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앨범을 미뤄온게 벌써 몇 년인데 며칠 더 미룬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다시 힘내서 녹음 잘하고 마지막까지 갈무리 잘하고 그리고 잘 놓아주면 된다. 아직 나의 봄은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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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널 라운드


좋은 생각을 많이 해야 좋은 말이 떠오르고, 좋은 말을 많이 해야 좋은 일이 생기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기면 좋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 글도 그래서 좋은 글을 남겨야 하는데 자꾸 안좋은 감정의 글만 남기는 것 같으니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그래! 얼마 전에 영우 형 소극장 공연을 다녀왔다. 비가 보슬보슬 오는 날이었는데 여대라 그런지 캠퍼스의 향기도 좀 다른 것 같던데? 그리구 관객들의 98%는 여자여서 진짜 형이 새삼 더 멋있게 보였다. 그런 지점이 뮤지션으로서 배울 좋은 점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한참 공연을 보다가 문득 ‘사랑해’ 라는 말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닳아 빠진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지금껏 내 노래들은 모두 사랑과 관련된 이야기였지만, 그 어느 한 곡도 사랑을 노래한 곡이 없었다. 이번 앨범 또한 본의 아니게 그러하게 되었으니 다음 번엔 ‘사랑’에 관한 노래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걸 잊고 있었네. '사랑'에 관한 노래. 


또 어떤 좋은 기억이 있을까.. 하고 창 밖을 보려 고갤 들어보니 일렬로 마주보고 있던 이들이 다 떠났네? 그러고보니 벌써 새벽 3시가 넘었다. 주저리주저리 끄적끄적하며 사진들 들여다보고 하다보니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덕분에 복잡했던 마음도 정리가 잘 된 것 같다. 도망나오길 잘했다. 다시 고운 맘으로, 다시 격전의 삶 속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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